2010. 4. 30. 17:45
 

기문은 아버지를 따라 3세 때 청주로, 초등학생이었던 8세 때는 충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충주에서는 마침 친척 분이 교편을 잡고 있었고, 기문은 그에 따라 충주 교현 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기문은 공부를 잘했고 성격이 유순했기에 전학 생활에 곧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촌놈이라며 놀리던 학급 아이들도 진지한 태도로 공부를 즐기는 그의 모습에 곧 그를 놀리기보다는 오히려 ‘반 선생’이라며 따르기 시작했고, 선생님들도 이런 그를 귀여워했다.

기문은 다른 것에는 욕심 없이 얌전한 편이었는데, 공부에서만은 달랐다. 그는 종종 친구들과 계산 시합, 외우기 내기, 주산실력 내기 등을 걸곤 했다. 그러나 이는 경쟁심이나 승부욕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자신의 수준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그런 순수한 욕심이었다. 기문에게 공부는,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고, 친구들과 종종 벌이는 공부 내기는 하나의 게임이었다. 재미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겨울밤, 변소를 다녀오다 잠이 깨면 기문은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는 책을 읽었다. 불 좀 끄라고 투덜대는 동생들을 다독여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주면 동생들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책을 읽곤 했다. 고요한 밤, 그렇게 책을 읽노라면 “그래, 이거구나!”하며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고, 집중력도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57년 3월, 기문은 충주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중학생이 되어 새로 배우게 된 영어는 단숨에 기문을 사로잡았다. ‘그래, 이게 미국 사람들 말이구나. 이걸 배우면 미국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겠네.’ 꼬부랑 글자들이 영 구별이 가지 않아 처음엔 걱정이 되었지만 집에 돌아와 스무 번씩 쓰는 숙제를 끝내고 나니 덜 헷갈리면서 이내 내일 수업부터는 큰 지장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기문은 공부라면 언제나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노래 솜씨나 그림 솜씨는 가지고 태어나는 소질이라는 게 필요한데, 공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있는 머리에 조금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이 좋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우선은 평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어든 본문이든 배운 것을 무조건 스무 번씩 쓰는 숙제는 기문에게 영어 문장을 통째로 외우게 함으로써 매우 효과적인 학습법이 되었고 한 번 재미를 붙인 기문의 영어 실력은 날로 발전해갔다. 

기문은 1960년 충주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영어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영어로 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고 외우고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은 ‘영어에 미쳤어’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루는 기문의 실력을 눈여겨본 영어선생님이 그를 불러, 교과서 내용을 가지고 영어 리스닝 교재를 만들어 보자며 녹음기를 내주셨다. 녹음기를 받아들고 고민 끝에, 기문은 충주 비료공장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료공장이었던 그곳에는 당시 기술 전수를 위해 미국인 기술자들이 몇몇 와 있었다. 콩글리시가 아닌 정확한 발음으로 교과서를 녹음할 생각으로 기문은 녹음기를 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갔다. 용기를 내어 몇 차례 말을 붙여 본 끝에 한 미국인 부인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1차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외국인과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기문은 놀랍고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의 영어공부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이후로도 기문은 그 미국인 부인의 도움을 받아 계속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먼 길에도 꼬박꼬박 찾아오고 한 마디라도 더 해 보려는 그의 성실함에 감명받은 부인이 그의 공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이웃 부인들에게까지 그를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또한 기문은 근처 성당에 미국인 신부가 부임하자 일요일이면 성당에 나가 그가 귀찮아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말을 걸곤 했다. 친구들의 말대로 그는 ‘영어에 미쳤었다.’ 앞으로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 성공 요소가 될는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던 때였지만, 단지 영어가 재미있었고 뭔가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해 줄 것 같다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기문은 영어에는 탁월했지만 음악과 운동 등 예체능 과목은 젬병이었다. 노래도 못하고, 당시 유행이었던 통기타도, 축구도, 농구도 못했다. 기문에게 잘하는 것은 오로지 영어였고, 그러다 보니 승부근성이 붙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영어에 푹 빠져 있는 기문에게 더 큰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김성태 영어선생님이었다. 고2때 만난 김성태 선생님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울의 명문대 출신으로 열성이 넘치는 교사였다. 그는 기문을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러한 선생님의 인정과 격려는 자신의 객관적 실력을 몰라 답답해했던 기문에게 큰 힘이 되어 이후 기문은 공부의 방향을 잡고 매 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게 되었다. 또한 김성태 선생님은 우등생들을 모아 청소년적십자단에 가입시켰는데, 정지영, 허문영 등 이때 만난 우수한 친구들은 기문에게 좋은 자극과 도움이 되었으며 어른이 되어서까지 깊은 인연을 유지하였다.